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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401 vote 0 2002.12.07 (12:26:32)

고양이가 방에 들어온다. 아랫목에 앉는다. 혓바닥으로 발등과 발바닥을 핥는다. 배와 등과 다리... 온몸을 핥는다. 앞발로 얼굴을 씻는다. 소위 세수라고 하는 이 몸 다듬기 작업이 끝나자 앞다리를 접고 얌전히 앉는다. 가까이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별로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다. 살짝 들어 안아 준다. 못마땅한 눈치다.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내린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다른 자리를 찾아 앉는다.

이것이 개 같으면 마구 뛰어오르고 핥고 야단일 게다. 고양이는 애교가 없고 자기 중심이다. 그러나 아부 근성이 없고 자주성을 가졌다 할 만하다. 사람 쪽이 고양이에 아첨할 때가 많은 것 아닌가. 고양이가 어느 고기 반찬보다도 김을 구워 비벼서 밥에 뿌려주는 것을 잘 먹더라는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괴짜 고양이도 있구나 싶었더니 최근 어느 동물 학자의 수필에서도 그런 얘기를 읽었다.

그 학자는 김 맛을 들인 고양이가 김밥이 아니면 먹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주인이 먹는 한 톳 80원짜리 김을 안 주고 60원짜리를 사다 놓고 주기로 했다. 그런데 60원짜리 김을 뿌려 놓은 밥은 냄새만 맡고는 앞발을 탈탈 털고 돌아서 버리고 결코 먹으려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너희들 사람은 향기 좋고 맛있는 고급을 먹으면서 나한테는 그 따위를 주다니 어디 혼자 먹을 테면 먹어 봐라! 하는 태도다. 옛날 이집트 사람들은 고양이 목에 보석 목걸이를 걸어 주고, 죽으면 임금같이 미이라로 안장했다고 하니 고양이 족의 오만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고 하겠다.
고양이 사촌뻘에 삵괭이가 있다. 동물원에 가면 굴 같은 우리 안에서 눈만 무섭게 반짝인다.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어도 바깥쪽에 나오려 하지 않고 항상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질을 말해 준다. 또 호랑이가 고양이를 보면 제 모양을 닮았다고 물어 죽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제 모양 닮은 것을 좋아하고 옷도 유행을 따라 입기를 자랑삼는데, 사람보다 한층 위에 있는 것이 괭이과 족속이라 할 것이다.

지금 고양이는 눈을 감고 있다. 실컷 먹고 배가 부르면 온몸의 부정(不淨)을 닦고 세상에 다시 없을 듯한 평화로운 얼굴로 이렇게 잠을 자는 것이다. 물론 조그만 소리에도 귀를 움직이고 눈을 뜨는 그런 잠이지만 이제는 잠밖에 일이 없다. 그까짓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거나 안겨서 아양을 떨거나 할 일 없이 시시한 몸짓을 해보이는 따위는 일체 하지 않는다.

누가 그를 깨워 제멋대로의 행동을 강요할 것인가1 그러나 제아무리 눈을 감고 바위같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고양이라도 그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깐 손톱으로 그 무엇을 긁어서 쥐가 나무를 물어 뜯는 소리를 내어 주면 된다. 그리고 번쩍 눈을 뜬 고양이 앞에 꼼지락 꼼지락 작은 물건을 움직여 보이면 된다.

고양이의 야성은 잠이고 뭐고 박차고 일어나 발을 버티고 한 곳을 노리면서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이나 끄나풀을 따라 달려가고 뛰어오르고 발놀림을 하는 그 자랑스런 유희는 결코 지칠 줄 모른다. 나는 언젠가 공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예술의 기원을 생각한 적이 있다. 예술의 발생에 노동설과 유희설의 두 가지가 있는 줄 아는데, 고양이가 공을 놀리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노동과 유희가 완전히 하나로 된 상태가 아닌가 싶다.

ㄹ선생의 집에는 나비라고 불리는 고양이를 벌써 여러 대로 기르고 있다. 이 나비는 먼저 대의 것은 제 이름을 부르면 「냐옹」하고 대답하더니 지금 것은 목소리 대신 꼬리를 꿈틀 움직여 보인다. 두 번 세 번 자꾸 부르면 꼬리의 동작이 차츰 작아져서 나중에는 꼬리 끝만을 달싹거린다. 먹고 싶은 음식이 나와도 꼬리가 움직인다. 고양이의 꼬리는 목소리와 함께 온갖 욕구와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데도 쓸모없어 보이는 꼬리가 이처럼 중요한 구실을 하듯, 입 언저리에 좌우로 쭉 뻗어 있는 수염도 다만 보기 좋으라고 돋아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리와 방향을 알아내는 구실을 하여, 고양이에게는 생명 보호에 없지 못할 긴요한 기관이 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

메기와 같은 물고기도 수염이 좌우로 한 개씩 뻗쳐 있는데, 고양이의 수염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수염이라기보다 곤충들의 촉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ㄹ선생의 나비 얘기를 계속해 본다. 보통 고양이가 새끼를 낳을 때는 사람이나 다른 짐승들을 극히 경계하여 숨어서 낳는다. 그런데 나비는 이와 전혀 반대로 선생의 가족의 품에 안기지 않고는 새끼를 못 낳는다는 것이다. ㄹ선생의 집안 식구들은 나비의 산파역을 언제나 해주고 있다고 한다. 나는 고양이 족의 명예를 위해서 나비의 이런 행위를 심히 유감스럽게 여긴다.

사람인 주인의 힘을 빌어서야 어미 뱃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고양이 새끼 다섯 마리가 자라나자 그 중의 한 마리는 출가한 선생의 따님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 고양이가 다시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겨우 걸어 다니는 새끼들을 두고 어미는 어디서 약 먹은 뒤를 먹고 죽어 버렸다.

고아가 된 새끼 고양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수는 있지만 똥 오줌을 뉘기까지는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어미가 밑을 핥아 주어야 똥 오줌을 누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터져 버린다. 어찌할까 쩔쩔매다가 시험삼아 새끼 없는 어미 개의 품에 안겨 주었더니 뜻밖에도 개가 고양이 새끼들을 품에 안고 핥아 주었다.

사람이 해내지 못한 고양이 어미 노릇을 개가 훌륭히 하게 된 것이란다. 고양이 새끼들이 자라나서도 어미 개를 진정 제 어미로 여기고 누워 있는 개의 등에 올라타고 혹은 목덜미를 자근자근 물어주고 다리를 핥아 주고 있는 진풍경을 보였다니, 모름지기 사람된 자들은 들어 깨달을 만한 얘기다.

그런데 그 어미 개는 고양이의 양모 노릇을 훌륭히 하였지만, 역시 개였지 고양이일 수는 없어, 새끼들에게 고양이로서 가져야 할 습성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고양이는 털이나 발에 흙이 묻으면 그것을 깨끗이 털고 핥고 닦는 것인데, 그 세수하는 버릇을 배우지 못한 고양이들은 자라나서 개같이 노상 흙투성이로 돌아다녔다.

땅을 파서 똥 오줌을 누고 덮어 버리는 일도 물론 알지 못했다. 그리고 고양이로서는 생명같이 소중한, 쥐를 잡는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한 번은 주인이 새앙쥐들을 여러 마리 생포해서 고양이 새끼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갖다 놓았더니 새앙쥐도 달아나고 고양이들도 놀라 모두 달아나 버리더라는 것이다. 짐승들의 습성이란 주위의 환경과 그리고 어미로부터 받은 훈련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새삼 알게 된다. 사람인들 어찌 다르랴. 환경과 교육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되는 것이 인간이다.

옛날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들이 귀족 같은 대우를 받았다지만, 그 후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점점 학대를 받아온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턴가 고양이 고기를 신경통의 특효약으로 써 왔다. 고양이를 잡아먹고 신경통이 나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억울한 고양이만 미신의 희생이 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고양이를 한 마리 길렀다. 부모님 몰래 먹던 밥을 떠 주며 기르던 그 고양이가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니 아랫방 천장에 목이 매달려 무서운 비명을 치고 발악을 하다가 죽었다. 외삼촌이 신경통 약으로 쓰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 때 그 고양이가 매달려 몸부림치던 광경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

그런 끔찍스런 일이 이따금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그래도 그 시절은 지금보다 고양이들에게는 자유스런 시대였다. 요즘은 고양이들이 살아갈 땅이 아주 없어졌다. 목숨을 이어갈 먹이인 쥐들을 함부로 먹다가는 즉각 오장이 타서 길길이 뛰고 뒹굴다가 죽는다.

도둑고양이는 이미 씨가 없어졌고, 집에서 기르는 것도 목에 나일론 줄을 달고 꼼짝 못하게 기둥에 매여 있어야 한다. 그들은 민첩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을 할 자유를 빼앗기고, 먹어야 할 것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상 추위에 떨면서 똥 오줌을 시멘트 바닥에 싸야 하는 모진 형벌을 받고 있다. 도시의 쌀 가게나 식료품 가게에서는 물론이고 시골 농가에서도 다만 생존의 권리를 빼앗긴 그들의 고통스런 울음 소리만이 그들의 살아 있는 표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고양이는 특수한 환경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극히 희귀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고양이다. 이런 고양이가 아닌 일반 고양이, 고양이 대중이라고 해야 할 그런 모든 고양이는 인간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양이를 학대할 수는 있어도 고양이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고양이의 수난시대는 인간 문명의 막다른 시대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을 이토록 학대하는 사람들이 땅 위의 주인으로 언제까지나 복 받고 잘 살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참으로 조물주의 뛰어난 걸작이란 느낌이 든다. 동물원의 호랑이를 봐도 그런 생각이 들고, 소도 염소도 새들도 모두 기막히게 잘 생겼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것이 사람인 것 같다. (1977, 여름, 한국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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